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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출처> KOREANOMICS (Sep, 2014)

​<출처> 미술과 비평 21 AUTUMN 2010

​생동하는 생명세계의 시뮬라크르

-2010년 박마리회화의 현재-

김영순(미술평론가)

 

1. 유동하는 물질세계에서 감각의 집적 (block of sensation) 으로

박마리의 회화는 생동한다.

          통통 튀듯 파동 치며 이어지는 원색의 반점들. 화면 위에서 서로 만나 뒤섞이는가 하면 밀어내는 물감들의 적나라한 표정. 현실의 구체적인 모티프나 사회적 사건의 단서를 최소화하고 있는 그녀의 화면은 세포의 핵분열이나 태양계의 폭발 순간을 연상시킨다. 말 그대로 비대상 회화, 추상회화이다. 연마된 화가의 손에 의한 인위적 표현과 세속적 세상사와 단절된 순수한 회화의 사건을 도모한다. 그 연원은 어디에 있을까? 작가는 “구상작업을 해 오던 어느 날 우연히 들린 책방에서 의학서적을 펼쳐 보았는데, 세포들의 다양한 도판을 본 것이 오늘의 작업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세포구조나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세포의 구조와 기관들이 보여주었던 공간관계와 생명의 흐름이 자아내는 생동성, 그 살아 있는 감각에 주목한 것이다. 그것은 그녀 내면에서 탐색하던 미적 원리의 발견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자연계에 내재된 미적 원리를 수학적 비례에서 찾아내었다면, 생명의 흐름과 생동성의 구조적 원리를 담보한 세포의 관계망은 박마리 회화의 방법적 원리를 제공했다. 유독 돋보이는 보색효과, 질펀한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물감들의 자율적인 뒤섞임과 흘러내림, 천진스런 낙서기법의 연필드로잉과 무의미한 유희의 자취를 남기는 붓질, 공간을 가르면서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나 점선들, 세포의 방을 시사하는 벌집구조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화면은 논리적 이념이전에 눈과 촉감에 호소하며 살아있는 생명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생동하는 생명의 과정을 표상하는 그것은 “생명은 그 자체로서는 직관할 수 없고 그것이 창조하는 살아있는 형식들 속에서만 직관 할 수 있을 뿐”이라는 들뢰즈의 이해방식에 의존하자면, 하나의 생명세계의 시뮬라크르(simulacrum)이다. 현실세계의 환영으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생성과 역동적 흐름을 감각의 실재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명세계의 시뮬라크르는 2007년 이후 <세포와의 대화> 연작으로 제작되어, 불과 3년 동안에 무려 7회의 개인전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8회째를 맞는 이번 전시는, 그 동안의 작업과정과 방법들에 대한 성찰과 자기 반역의 재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2. 회화의 생동성 (vitality) 과 생명의 생동성 사이에서

 

          회화는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체로 생동할 것을 지향해왔다. 그 생동성에의 추구는, 현실을 원상으로 한 재현예술이든, 캔버스 위에서 즉자적 세계를 추구하는 추상예술이든. 또 상반된 환경을 배경으로 서로 대극적 세계관을 담보하고 있다고 분류해온 동ㆍ서양화가 공히 궁극적으로 하나의 꼭지점에서 만나는 지점이다. “아펠레스가 포도송이를 그리면 새들이 날아와 그림을 쪼았다”던가, “황룡사벽의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 새가 날아들어 벽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는 신화는 재현예술이 지닌 유사성의 기술에 대한 찬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 시각적 ‘생동성’에 무게를 싣고 있는 진술인 것이다. 뿐인가, 애초부터 현실세계와 무관하게, 점ㆍ선ㆍ면, 터취나 色斑, 물감 자체로 생명의 약동이나 죽음과 같은 절망의 상태를 직재적으로 지각하게 하는 추상회화는 눈속임의 매개 없이 직접 회화의 생동성을 전달할 것을 욕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생동성이란 작가의 정신적 감정이나 공간감각, 운율, 생동적 감응력 등이 어우러져 작품전체에서 발신되는 것으로, 작품의 품등을 매기는데 있어 제1의 가치로 중히 여기는 동양화론의 기운생동(氣韻生動)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생명세계의 생동성에 천착해온 박마리회화의 그것은 크게 세 단계로 변용되어왔다.

          초기의 그것은 생명체의 흐름을 표상하기 위하여, 조형적 매재의 물질성과 색채감각의 극대화, 자동기술법에 의한 올오버회화가 되었다. 눈에 종속되었던 손, 형태를 위하여 존재했던 색채나 물질성의 굴레에서 해방된 색채의 자율성과 터취의 행동성을 만끽하고 있다. 무의식에 내맡긴 드리핑작업과 물감의 흘러내림 같은 우연의 효과가 화면을 지배했다. 물질감각을 강화하기위해 라텍스라는 매재로 반부조의 융기된 얼룩을 만들고, 역동적 과정을 현재화하기 위하여 물감이 섞이는 과정의 표면을 고정하여 떠낸다. 순간적인 우연의 효과를 케취하는 데콜라쥬(décollage)기법을 채용한 것이다. 이중 삼중의 보색의 굴레 안에 꼬물꼬물한 형태로 채워진 얼룩 면들이 화면 전체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상하 좌우의 위계없이 떠돈다. 낙서기법의 드로잉이 천진스러움을 자아낸다.

          이 시기의 작업을 굳이 현대미술사의 문맥에서 계열화 하자면, “자연, 나무, 동물, 대기에 관통하고 있는 피의 흐름을 읽었던 청기사그룹의 프란츠 마르크가 추구했던 ‘자연에 내재된 원초적 생명의 흐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으로는, 물감이 튀어 우연히 점선을 만들며 떨어진 색점이나 얼룩, 역동적 순간을 포착하려는 데콜라쥬, 화면의 중심이나 위계를 부정하는 올오버 회화적 요소에 주목해 볼 때, 초현실주의 문맥에 위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성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심리적 자동기술, 비합리적이고 프리미티브한 세계의 투사나 분열증적 화면 구성이야말로 르네상스 이후의 ‘응시’의 시각이나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대신하여 무의식의 세계를 열고 생명의 흐름을 표현하려는 초현실주의와 접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앙드레 마송이나 아실 고르키의 생물형태의 이미지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생동성을 배가하고 있는 보색대비의 색채효과이다. 극단적인 원색대비에도 불구하고 생경하게 충돌하지 않고 조화하며 오히려 미적 효과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박마리이라는 작가의 생래적인 색채감각을 노정한다. 색채는 장식미를 수반하기 쉽다는 점에서, 유교문화의 전통이나 이념적 지향성이 지배했던 근현대미술사가 기피했던 요소이다. 따라서 우리 근현대 회화에서 취약한 부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색채감각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두 번째 단계는 앞의 회화적 성취를 기반으로 하면서, 간접적인 소통의 언어를 추가하기 시작한다. 무심히 장난삼아 낙서하듯 휘그은 자유드로잉이 화면의 곳곳에 삽입되고, 생화학실험실의 연구노트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호나 알파벳문자가 기입된다. 방향이나 위계를 거부하고 자유분방하게 유동하던 화면에는 벌집구조의 그물망이 부분적으로 덧 씌어져 구조적 안정감을 획득한다. 과도하던 물질감과 색채감정은 그레이나 브라운 톤으로 진정되고, 수묵화의 감필법을 구사하듯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닦아내거나 긁어내어 초기의 질펀한 물질감은 수채화 같은 투명성으로 전환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와의 연대를 견지하면서, 매스미디어 시대의 정보의 만화경을 심상의 메타포로 제시했다는 라우센버그의 회화와의 연계성이 진단된다.

          세 번째, 바로 제8회 개인전을 맞은 박마리 회화의 현재이다. 작품을 경영하는 사고는 깊어졌고, 화면은 순수한 자율성과 인위적인 표현이 어울려 세련화의 단계에 들어섰다.

          무제한 발산되던 강렬한 원색의 향연은 절제되고 세련되기 시작했다. 다듬지 않은 원색대비의 정열적 감정효과 대신 은회색이나 금빛을 띤 핑크나 셉 그린, 브라운 톤의 반투명성이 쉬크한 도시감각을 자아내고 있다. 원색이 갖고 있던 생동감은 반짝이는 금속성의 펄로 대체된 것이다. 화면은 좀 더 중층적이고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단계에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외부세계의 이입을 배제하고 생명의 생동성을 직재적으로 표현했던 순수추상에 현실사회의 이슈나 삶의 체험이나 기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조심스럽게 기호로 접근했던 현실사회와의 소통이 본격화 된 것이다. 여전히 은유적인 형태를 도입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지구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생명의 잉태를 둘러싼 생명론을 담보하고 있다. 게다가 당대의 미술담론이나 지식의 채용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투사하고 있다. 임신체험을 통한 생명탄생에 대한 경외와 희열을 이입하기도 하고, 사회학적 문제로서의 낙태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도구화 된 여성의 몸의 문제도 작업의 지형도 안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여성작가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자기고백적인 나래이션은 경계한다. 자칫 페미니즘의 회화로 범주화하여 경계(境界) 안에 가두어 지는 일을 경계(警戒)하는 것이다. 그녀의 현재의 작업은 <생명세계의 생동성>을 살아있는 표상으로 제시하는 데에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감과 희열, 다산의 축복과 같은 유토피아, 또는 인위적인 낙태를 통한 살인이나 각종 생명을 위협하는 생태학적 디스토피아가 이번 전시에서 박마리가 제시하고자하는 표상세계이다.

 

3. 물질과 비 물질 사이에서 흔들리는 생명의 생동성

 

          동력에너지에 의한 교통수단의 발달이 대항해 시대를 열어 세계각지의 산물과 정보를 한자리에 모은 박람회가 성행하고, 사진과 활판인쇄술의 진보로 출판업이 성행하던 시기에 미술비평은 대중에게 미술을 매개하는 주요통로가 되었다. 단토가 예술의 죽음을 진단했던 “그들만의 가치생산의 권력 장인 미술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형태에 종속되었던 물질과 색채가 해방되고 터치가 스스로 시민권을 획득했다. 회화의 자율성, 회화의 모더니티가 성립된 것이다. 그 모더니티의 선구적 표준모드요, 인상파라는 유파의 명칭을 탄생시킨 ‘일출(Impression, soleil levant)’의 화가 모네를 21세기의 한 평론가는 “물질과 생명 사이에서 흔들리는 꽃”으로 보았다.

          여전히 오늘 우리의 삶은 물질세계에 속해 있다. 하지만 비 물질의 세계가 압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상의 상당부분이 인터넷 정보세상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지구촌을 유랑할 수 있다.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다. 생명의 세계도 자나 복제도 서슴치 않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이미 인공생명테크놀로지로 구현된 예술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연계와 인공생명의 상호 협력체제 속에 생명의 정보를 밝히고 기관의 대체유동하는 물질의 역동성과 물질로서의 속성이 강한 색채의 터치에서 생동성을 발산해온 박마리의 회화도, 2010년 현재의 작품에 정보화기술의 시뮬레이션작업으로 취득한 생명체의 이미지를 도입하였다. <세포와의 대화>를 화두로 지난 3년간 보여준 박마리의 발전적 작업 행보가, 물질과 비 물질 사이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그녀의 생명세계의 시뮬라크르가 또 다른 비약을 예고하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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